아, 엄마는 이런 여행자시구나 – 대만 타이베이 모녀여행 (4.끝.)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우리 모녀는 타이베이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용산사를 방문하기로 했다.

시내버스를 타러 나가는 길에, 저 멀리 보이는 101타워가 멋진 하늘과 함께 아침인사를 해주었다. 샹산에 올라서 보는 야경보다 이런 아침 풍경이 더 희소하지 않을까.

밝아오는 타이베이의 아침
밝아오는 타이베이의 아침
타이베이 마지막 날 아침. 101타워와 밝아오는 하늘
확대해서 본  101타워.

아침잠이 없는 우리 모녀는 알람의 도움 없이도 새벽 일찍 일어났다. 용산사에 대한 기대와, 끝나가는 여행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어디엘 가든지 아침 일찍 풍경을 꼭 꼭 챙기는 편이다. 아침의 고요함을 누리고 있자면 세상 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하나씩 맛보는 느낌이 든다.

용산사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할머니.
용산사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할머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대만에서 꼭 먹어야한다는 온갖 유명한 것(망고빙수, 우육면, 소금커피 등등)들을 어쩌다보니 하나도 먹지 않았었는데, 용산사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85도 소금커피도 맛볼 수 있었다. 단맛과 짠맛을 함께 버무린 ‘단짠’맛이 트렌드라는데, 소금을 의식하고 먹기 때문에 짠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용산사의 문이 열렸다.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불심(이라고 표현하기엔 대만의 종교는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있는 듯 하지만 여튼)깊은 신자들 틈바구니에서 우리만 여행객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용산사의 인공 폭포 연못. 가동 전이라 물이 흐르기 전인데, 이끼가 꼭 매생이같다.
용산사의 인공 폭포 연못. 가동 전이라 물이 흐르기 전인데, 이끼가 꼭 매생이같다.

대만의 절에는 점괘를 보는 특이한 방법이 있다. 간밤 스린야시장 안에 이름모를 절에 들어갔다가, 다른 한국인 관광객 한 명이 일행에게 설명해주는 걸 어깨너머로 훔쳐듣고 우리도 따라해보았다.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빌고, 반달모양의 윷같은 걸 두개 던져서 서로 앞/뒤 다른 모양이 나오면 긴 막대기를 뽑고, 한 번 더 반달윷 두개가 앞/뒤가 나오면 그 막대에 쓰인 숫자에 따라 점괘 종이를 뽑는 시스템이다. 소원을 빌 때 신상 정보를 속으로 꼭 외워야하고, 반달윷이 앞/뒤 다른 면이 나오지 않고 앞/앞, 뒤/뒤 같은 면이 나오면 다른 면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야 한단다. (사실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다 ㅋㅋ)

아침 6시의 용산사. 불자, 승려들이 줄지어 경을 외는 모습
아침의 용산사. 불자, 승려들이 줄지어 경을 외는 모습

6시를 조금 넘겼을 때였나. 검은색, 갈색의 도포를 걸쳐입은 사람들이 대형을 갖추고 경을 외기 시작했다. 이 진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용산사를 방문하기 좋은 시간이 따로 있다 들었는데, 아침 6시가 그 타이밍 중 하나였다.

건물 그림을 좋아하다 보니, 지붕의 디테일한 면까지는 여행 중에 완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용산사에서 이 그림을 그리다가, 펜이 수명을 다했는지 선이 희미해졌다. 보통은 시간을 따로 내어서 지붕 기와 부분을 더 작업하곤 하는데, 이 그림은 어째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자연스레 표현이 된 것 같아 그냥  내비두기로했다. 소 뒷걸음치다 쥐잡았다.

용산사에서의 경건한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마친 후 10일이 넘는 시간이 또 훌쩍 흘렀다.

첫 모녀여행. 엄마를 더 잘 알게 되는 기회였다. 가까울수록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엄마에 대해 참 많이 몰랐던 게 사실이다. 특히나 여행할 때의 엄마는 엄마도, 나도 처음이니까. 이번 여행중에 몇 번씩, 호기심 가득한 소녀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우펀 버스 정류장에서, 딸내미는 절 지붕이 멋지다며 그림에 꽂혀있는 동안, 우리보다 먼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청년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의외라고 생각했다. 또, 스린야시장에서 점괘보는 법을 설명해주던 다른 한국인 학생들에게, 본인도 컨닝 좀 하자며 넌지시 말을 거는 모습도 보았다.

평소에 낯선 사람에게도 곧잘 말을 붙이는 내 붙임성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우리 엄마에게서 왔구나.

엄마들은 보통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문득, 엄마라는 이름 속에 묻혀있던 한 인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힘들 때 엄마를 떠올려본다. 기나긴 생을 살아오시고 더 굽이진 굴곡을  겪어오신 엄마는 어떨까. 정말 그냥 위대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뜬금없지만 그렇게 메세지를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돌아온 엄마의 대답.

엄마 : 내 엄마는 더 위대했다.

위대한 우리 엄마와, 하늘에서 우리와 함께 하셨음이 틀림 없는 엄마의 엄마까지, 세상 모든 위대한 엄마들 모두 감사드린다.

역시나, 엄마 말은 옳다 – 대만 타이베이 모녀여행(3)

우리 모녀는 또 하루의 알찬 시간을 위해 새벽 일찍부터 지우펀 숙소를 나섰다. 타이베이 시내행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소로 향했다. 지우펀이 산 속에 위치한데다, 우리 숙소가 언덕 꽤 아래에 위치했고 아침부터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정류장에 도착한 우리는 이미 땀을 뻘뻘 흘린 상태였다.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 참았다가 하나, 둘, 셋에 내려다본 산 아래 풍경을 맞이한 등산객의 느낌이랄까. 지우펀에서 그렇게 그리고팠던 밤 거리 풍경은 못그렸지만, 여행은 늘 새로운 기회를 선사하는 법.

 

지우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다본 풍경
지우펀 버스정류장에서 내려다본 풍경

그림 속 지붕은 우리 숙소 바로 옆에 있던 절이다. 주황색의 기와지붕 끝이 새침하게 뾰족 솟아있고, 각 모서리마다 용, 봉황, 선녀, 도사(?), 장군(?) 등 여러 동상이 멋드러지게 위용을 뽐내고 있다.

간밤의 문닫힌 후의 절. 아침에 저 사잇길 계단을 오른 후 내려다본 풍경을 그렸다.
간밤의 문닫힌 절. 아침에 저 사잇길 계단을 오른 후 내려다본 풍경을 그렸다.

여행 중 대만의 종교에 대해 알아봤었는데, 도교와 불교, 토속신앙이 섞여있다고 했다. 실제로 택시 투어 중 산 중턱 곳곳에 위령비(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모신 조그마한 사당이 모여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택시 아저씨 말로는 영원히 두는 건 아니고, 몇년만 뒀다가 철거한다고 했다. 우리 모녀는 우리네 공동묘지같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마무리지었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버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지우펀 거리에서 미리 사둔 간식거리
지우펀 거리에서 미리 사둔 간식거리

어제밤 이른 아침 여정을 대비해 사둔 간식을 먹을까 하고 입맛을 다시며 꺼냈다.

지우펀에서 탄 타이베이행 버스 안. 잘보면 음식섭취 금지, 흡연금지 표시가 있다.
지우펀에서 탄 타이베이행 버스 안. 잘보면 음식섭취 금지, 흡연금지 표시가 있다.

한 입 베어먹으려던 찰나에 발견한 표시. 아차. 대만은 대중교통 이용시에 음식 섭취가 엄격히 금지된다고 했었는데, 싶어 황급히 모른척을 시전하고 슬그머니 가방에 도로 넣었다.

타이베이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힌다는 고궁박물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하다는 옥배추는 전시기간이 아니라고 하여 우리 모녀가 좋아하는 그림 구경만 실컷 하고 왔다.

사실상 대만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 이것 저것 구경을 많이 하고 싶었다. 먹거리로 유명한 융캉제 거리도 구경하고, 더우면 망고 빙수도 먹고, 시원한 버블티도 마시고 싶었건만…(쓰고보니 구경이 아니라 먹고픈 게 많았던 거구만!) 그러나 한 줄기씩 내리던 빗줄기가 점차 세지기 시작했다.

101
허리를 꺾어야만 전체를 볼 수 있는 101타워. 날씨가 저리도 흐렸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타이베이에서 꼭 그리고팠던 또 하나의 그림을 놓치게 될까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타이베이 101타워가 보이는 야경을, 꼭 보고, 그리고 싶었다.

뉴욕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모두가 떠올리는 뉴욕 풍경 속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벅찬 마음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 보는 야경은 기대했던 풍경과 다를 수밖에 없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서는 정작 그 빌딩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실 한 발자국 떨어져야만 그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상상하는 타이베이의 풍경 속에는 늘 101타워가 있지만, 정작 101 전망대에 오르면 그 상상하는 풍경이 나오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도 마찬가지다. 생각하는 101 타워 야경을 보고싶다면, 샹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에 오르는 고생이 필요하다.

대만으로 출발하면서부터, 나는 어머니께 꼭 한 번 저녁 일몰 시간에 맞춰 샹산에 오르자고 했었다. (여행기를 쓰다 보니, 엄마를 잘 모시겠다는 것보다 내 욕심을 앞세웠던 것이 아닌가 반성이 된다. 이런 못난 딸내미) 전날 지우펀의 야경 스케블링을 어이없게 놓쳐버린 것이 더 마음에 걸렸는지, 사실 나는 무리해서라도 저녁에 샹산에 오르고 싶었다.

101타워 89층에 위치한 전망대에 올라서도 나는 샹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101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샹산. 저기를 오르고 싶었다.
101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샹산. 저기를 오르고 싶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는 딸내미에게, 엄마는 말씀하셨다.

하고싶은 걸 다 할 수는 없으니, 하나는 포기를 하자.

결국 그리하여 전망대에서 내려온 우리는, 타이베이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스린야시장과, 한국인을 위한 쇼핑코너를 따로 만들어두기까지 했다는 까르푸에서의 쇼핑을 하기로 결정했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숙소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내 마음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스린야시장은 지하철 노선도에서 샹산과 정반대에 위치했기에, 눈앞의 샹산을 두고 견우 직녀 이별하듯 반대편으로 향했다.

타이베이 최대 규모라는, 스린야시장
타이베이 최대 규모라는, 스린야시장

시간은 이미 일몰시간이 가까웠고, 샹산에 있었어야 할 시간인데 싶었다. 하지만 스린야시장이 가까워올수록, 엄마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는 계속하여 내렸고, 이 시간에 비를 맞으며 산길을 올랐다고 생각해봤다. 그리고 문제는 엄마보단 내 쪽에 있었는데, 불편한 신발과 함께한 지난 며칠간의 도보 여행으로 내 두 다리는 꽤 심한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비 덕분에 야시장 거리는 그리 심하게 북적이지 않았다. 가끔씩은 처마 밑에서 보슬비를 피하기도 하면서, 무리하지 않고 그날의 일정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역시, 엄마 말 들어서 손해볼 것 없다니까.

 

 

아, 허망하게 날아간 센과치히로! – 대만 타이베이 모녀여행(2)

타이베이에 당도했을 즈음은 이미 저녁시간으로 해가 진 뒤였다. 숙소에서 가까운 야시장 한 군데를 잠시 들러 아쉬움을 달랬다.  본격 타이베이 여행은 바로 둘째날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미리 예약해둔 “예스진지” 택시투어의 시작시간은 오전 9시.

택시투어는 대만 근교의 소도시를 기사 겸 가이드와 함께 택시로 여행하는 대표 여행상품이다. 예류, 스펀, 진과스, 지우펀의 앞글자를 따서 보통 ‘예스진지’라고 하지만, 취향, 예산, 시간에 맞게 행선지를 빼거나 추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으로 유명한 지우펀에서는 붉은 등에 불이 켜지는 것은 저녁 시간대이므로 , 보통 8~9시간 소요되는 예스진지 투어는 오전 9시 경엔 출발하는 것이 (업체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적이다.

 

예스진지 첫 코스 예류. 독특한 돌들을 볼 수 있는 지질공원이다
예스진지 첫 코스 예류. 독특한 돌들을 볼 수 있는 지질공원이다

한국인 고객을 겨냥한 것인지, 카톡으로 성황리 영업중인 대만택시투어 업체가 여럿이었다. 원하는 일정, 코스로 문의를 넣의면 견적을 받아볼 수 있다.  업체마다 여러명의 기사를 보유해서 고객과 매칭해주는 시스템인듯 했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은 기사님께 받은 감동을 후기로 남겨놓는 경우도많기 때문에 쉽게 레퍼런스 체크가 가능하다. (그치만 왠지 어느 기사님과 되더라도,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사진사처럼 사진을 찍어주며 어느 포인트에서 뭘 해주더라 하는건 약간 서비스 수준이 수렴하지 않나..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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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더웠는데, 예류지질공원 구경 후 택시 기사 아저씨가 밀크티를 사주셨다. 나이스타이밍!

두번 째 행선지인 스펀으로 가는길에, 택시아저씨가 설명해줬다. 한국, 일본 관광객들은 개별 택시 관광을 선호하고 중국인들은 대형 버스로 단체 관광을 많이 한다고. 그러고보니, 예류에서 중국 관광버스가 줄지어 있었던 게 생각났다.

스펀의 명물, 천등날리기
스펀의 명물, 천등날리기

스펀은 기찻길이 지나가는 아주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천등날리기가 이 작디 작은 마을을 그리도 유명하게 만들어주었던 걸까. 엄마와 나도 우리의 소망을 차곡차곡 네 면 가득히 적어 하늘로 띄워 올렸다. 나중에 안타까웠던 것은, 타이베이의 그 어떤 야시장도 스펀만큼 예쁜 기념품을 팔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등 미니어처는 정말 예뻤다.

한 시간 남짓한 자유시간동안 그린 스펀. 한 시간에 한 번 지나다니는 기차를 두 번 봤다.

한 시간 남짓한 자유시간동안 그린 스펀. 한 시간에 한 번 지나다니는 기차를 두 번 봤다.

 

진과스 가는 길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내려준 음양해.
진과스 가는 길에 택시기사 아저씨가 내려준 음양해. 산에서 내려온 광물 때문에 바다색이  저렇게 보인다.

세 번째 행선지인 진과스는 금광업으로 한 때 꽃을 피웠던 마을이다. 황금박물관이 있는 산 중턱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요 녀석이 사람과 금광 캐는 도구를 실어나르지 않았을까.
요 녀석이 사람과 금광 캐는 도구를 실어나르지 않았을까.
진과스의 광부도시락
진과스의 광부도시락

광부도시락. 도시락까지 패키지로 판매하는 메뉴를 시키면 도시락통까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녀에게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어. 정말로 광부들이 금광 안에서 먹었을런지는 모르겠다.

택시 아저씨가 보여준 아주 심플한 버전의 지우펀 약도
택시 아저씨가 보여준 아주 심플한 버전의 지우펀 약도

이 날 마지막 도착지는 지우펀.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센과 치히로를 재밌게 봤기 때문에, 홍등 가득하고 시끌벅적하며 몽환적인 그 분위기에서 꼭 그림을 한 장 그리고 싶었다. 대만 여행에서 그리겠노라 마음먹었던 게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예스진지 투어 후 타이베이 시내로 돌아가지 않고, 천천히 여유롭게 둘러본 후 1박을 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해가 진 이후에 꽃피는 지우펀의 밤거리
해가 진 이후에 꽃피는 지우펀의 밤거리

내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택시 아저씨가 보여준 약도는 정말 간략버전의 지도였고, 실제로는 엄청 구불구불 골목길의 연속이다.

이름 모를 절에 향도 피우고, 밤까지 무더웠던 열기를 식히고자 테라스가 있는 식당에서 식사도 마쳤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그림그릴 포인트를 찾았던 나는, 결국 다시 내가 원하는 포인트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어머니께 부탁해서 함께 다시 계단을 올라 그 포인트를 찾았다.

아메이 찻집. 센과 치히로에 나온 건물의 실제 모델이라나.
아메이 찻집. 센과 치히로에 나온 건물의 실제 모델이라나. 이 사진을 찍은 포인트가 바로 그 문제의 포인트.

다시 찾은 나의 포인트. 가방을 열고 스케치북을 열었는데, 어…라? 필통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림을 그리겠노라고 야심차게 가방을 싸면서 마지막 순간에 필통을 숙소 책상 위에 두고온 듯 했다.

엄마는 딸내미 소망을 위해 다시 숙소에 다녀오자고 말씀해주셨지만. 다시 지우펀 거리를 벗어나 숙소로 향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우펀에는 그림그리러 나중에 다시 한 번 와야할 운명이구나. 아홉 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지우펀의 상점들은 이미 반 이상 문이 닫혀 있었다. 남은 상인들도 하나 둘 문을 닫고 있었다.

자기 이름을 찾아 헤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새 문을 닫고 있다니. (24시간 잠들지 않는 대한민국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구나.)

여행 중에는 상황에 맞게 놓을 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아쉬움이 컸지만,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마지막 영업중인 빙수집에서 대만빙수를 먹었(다가 다 녹아서 마셨)다.

그래도 지우펀에서 충분히 놀고 즐긴 우리 모녀는, 아침 일찍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헉! 대만여행에 비자가 필요했던가? – 대만 타이베이 모녀여행(1)

2016년 6월 3일~ 6월 6일. 내게는 역사적인 3박 4일이었다.

모처럼의 연휴를 활용해, 3박 4일간 어머니를 모시고 대만 타이베이에 다녀왔다.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제법 해외여행 노하우를 쌓았다는 딸내미와는 다르게, 이번 여행은 어머니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진작에 어머니를 모시고 바다를 건너고 싶었었는데, 마음같지 않은 세상의 타이밍은 올해에서야 첫 모녀 해외여행을 성사시켜 주었다.

엄마는 출발 몇 개월 전, 처음으로 여권을 만드셨다. 소녀같은 우리 엄마, 얼마나 설레어하셨을지. 구청에 여권을 신청하러 가셨을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떳다 떳다 비행기
떳다 떳다 비행기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나로서도 참 설레고 기대가 되는 이벤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에 있어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한 일인데, 나는 우리 엄마가 최고의 여행메이트가 될 것이란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엄마의 취미 또한 그림그리기이다. 모전여전인걸까.엄마는 몇년 전 동네 문화원의 미술강좌를 수강하시면서 본격 미술취미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셨다. 전공자의 길을 일찌감치 때려쳤던 딸내미는, 차마 내다버리지 못하고 보관중이던 갖은 화구로 전폭적인 지지의사를 보냈다.

엄마에겐 작업실도 있다. 바로,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우리집 베란다. 멋드러지게 펼쳐진 이젤 옆으로 물감, 캔버스, 붓통 등 온갖 화구들을 다 갖춘 엄마의 작업실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 특유의 물감 냄새가 스며있다.

그림그리는 우리 엄마
그림그리는 우리 엄마. 그림 그리시는 고운 모습을 지켜보다가 몰래 그렸다.

어릴 적 미술학원을 나름 전문적으로 다닌다고 설쳤던 나인데, 그때의 나는 비교올리지도 못할 정도의 포스를 풍기신다. (엄마는 늘 취미반일 뿐이라며 아니라고 하시지만) 수채화, 유화 습작들이 쌓여있는 그 공간은 엄마의 손길이 가득한 정말 멋진 공간이다. 때론 과감하게 색을 내는 붓터치를 보자면, 그리고 몇 장씩 쌓여있는 같은 그림의 습작들을 보자면,  입시 미술의 틀 안에서 놀았던 (같은 그림은 지겨워서 절대 두번 못그리는 성격의) 나는 부끄러워질 뿐었다.

다시 여행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엄마는 여행 중에 그림을 그리느라 한참을 멈춰있을 딸내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기다려주실 수 있는 분이다. 어쩌면 같이 그림을 그리실지도. 언젠가 유럽 모처의 안개낀 호숫가 마을로 함께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리러 가고 싶다.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가기도 전에 이런 소망들부터 뭉게뭉게 피어났다. 언젠간 가겠지. 믿는다, 나의 실행력)

여튼 첫 여행이니만큼, 가볍게 다녀올 수 있게 그리 멀지 않은 대만 타이베이로 첫 행선지를 정했다. 그리고 나의 제1의 목표는, 엄마를 편하고 즐겁게 모시는 것. 하여, 나는 미리부터 나름의 경험치를 십분 활용해 야심찬 준비를 하였다.

엄마는 나만 믿고 몸만 오시면 된다고 큰 소리를 떵떵 쳤었더랬다. 척척 알아서 가이드까지 다 하는 딸이 되리라고. 여행을 좀 다녀본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다 아는 노하우들이지만, 괜시리 엄마 앞에서 ‘아이고 우리딸 최고다’하는 칭찬을 듣고 싶었었던 것 같다. 미리 환전해둔 돈 공항에서 찾기, 현지에서 쓸 어댑터 통신사에서 빌리기, 자동출입국심사 등록시켜드리기 등 노련한 여행자의 자태를 뽐내며 공항을 누볐다.

우리가 너무 일찍 공항에 도착한 탓인지, 체크인 시작 시간이 생각보다 늦길래 한참을 공항 구경을 하고 다시 체크인을 카운터로 갔다. 그랬더니 이미 인산인해로 북적이는 카운터 앞. 별것 아니지만 나는 또 여행자 신공이랍시고 웹체크인을 시도했고, 전용 카운터에 대기없이 짐을 부치고, 여전히 대기중이었던 많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쳐 입국심사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엄마가 감탄하시고, 나는 뿌듯할 수 있었던 소소한 포인트 하나 추가!

작년 가을 처음으로 ‘공항 라운지’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신. 세. 계.란 이런것이구나. 항공권, 숙박 예약 후 처음으로 준비했던 건 바로 어머니를 위한 공항 라운지용 카드발급. 지인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폭풍검색으로 검증을 한 후 가족카드가 발급되는 종류로,  라운지 전용 카드를 새로 발급받아 두었다.

출국전, 인천공항에서만 3개의 라운지를 돌았다.
출국전, 여유가 넘쳤던 우리는 인천공항에서만 3개의 라운지를 돌았다.

공항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우리 모녀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곤히 잠을 청했다. (심지어 나는 이륙도 하기 전에 잠들었다.) 그리고 나온 비행기 기내식. 사실 하늘 위에서 먹는다는 특별한 점 하나 빼고는 음식 자체가 뛰어난 것도 아닌데, 아주 특별한 그 점 하나가 우리를 설레게 하는 법이다. 미리 주문해둔 스페셜 밀로 다른 메뉴를 받아내면서 또 엄마 감탄시키기 한번 더 성공.

비행기하면 기내식!
비행기하면 기내식!

‘해외여행 노하우 많은 멋진 딸’ 놀이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승무원이 나눠준 대만 입국신고서, 당연히 엄마는 내게 작성을 위임했고 나는 또 자랑스레 맡겨만 달라며 으쓱했다. 하지만 나를 당황케 한 대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비자.

비자 종류와 번호를 쓰라고?

응?

응??

어라????

항공권, 호텔, 현지에서 이용할 투어, 기념품, 방문할 장소, 라운지 신용카드, 환전, 콘센트 등 그 수많은 걸 준비하고 기획하면서 어째서 나는 한번도 ‘비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권파워 세계 2위라는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로서, 무비자 여행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당연히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럽 국가나 동남아 어딘가라면 차라리 안심했을텐데, 상해에 갔을 때 별도의 비자를 미리 발급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팽팽돌아가는 머리 속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

대만에 내렸는데 비자 때문에 입국 거부를 당하면 어찌되지? 나야 그렇다 치는데 엄마는 어쩐다? 아 왜 네이버에 ‘대만 비자’ 이 네 글자를 검색해볼 생각을 못했지, 다른 사람들은 다 발급 받았나? 필요한 거 맞을까?

강심장 우리 엄마는 덤덤해 보였다. 뭘 어찌하든 늘 믿어주는 우리 엄마의 스타일일까. 당황하는 딸 옆에서 당황을 거들어보았자 해결되는 건 없다는 지혜를 터득한 어머니의 위엄이었을까.

나도 다시 차분히 생각을 시작했다.

대만 비자가 필요했다면 내가 무수히 드나들었던 대만여행카페나, 안내책자에 관련 정보가 없을 턱이 없었겠지. 아무도 비자에 대한 말이 없었단 말씀. 즉,  대만도 무비자가 맞을거야!

착륙 후 공항 와이파이 신호를 잡자 마자 검색해본 결과,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대만을 관광목적으로 방문 시 90일까지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단다. 예상은 했지만 안도의 한숨.

그제서야 뭔가 탁! 하고 풀리는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엄마랑 즐겁게 여행을 하고싶었고, 엄마의 첫 여행을 위해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많이 긴장을 하고 있었구나. 정작 엄마는 몇번이고 무리할 필요 없다고 나를 다독여 주셨는데. 실제로 엄마는 가고싶은 것, 하고싶은 것에 대해 재차 묻는 내게 간단히 대답하셨었다.

“101타워 이런 사람많은 데 안가도 된다”

“망고빙수 먹고 야시장? 그림 구경이나 좀 했으면 좋겠다”

모녀여행의 초입에서, 나도 모르게 바짝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잠시 내려놓게 되는 순간이었다. 엄마랑 나랑, 그저 즐겁고 함께하는 게 좋은 여행이 되기를.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싸우는 일 없기를!!!